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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에서 시작된 한국영화 (경성, 조선, 나운규)

by 머니슈렉 2025. 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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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에서 시작된 한국영화 관련 사진

 

한국 영화의 기원은 단순한 영상 기록의 역사라기보다, 일제강점기라는 특수한 시대에서 탄생한 민족의 목소리였습니다. 그 중심에는 조선의 수도였던 '경성'이 있었고, 이곳에서 한국영화의 첫 발걸음이 시작되었습니다. 경성은 서구 문물의 통로이자 영화의 상영지였을 뿐 아니라, 제작·기획·상영이 모두 이루어졌던 영화 산업의 출발점이었습니다. 나운규 감독의 '아리랑'이 상영된 단성사를 비롯해, 경성은 한국 영화 태동의 무대이자 조선 민중의 정서를 담은 스크린의 고향이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경성이 어떻게 한국영화의 중심이 되었는지, 조선 영화 산업이 민족정신과 어떻게 연결됐는지를 역사적, 문화적 맥락 속에서 심층적으로 살펴봅니다.

한국영화의 시작, 경성이라는 무대

한국 영화의 시초를 이야기하려면 반드시 ‘경성’을 언급해야 합니다. 경성은 오늘날의 서울로,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의 정치·경제·문화 중심지였으며, 서구 문물의 유입이 가장 먼저 일어나는 장소였습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영화'였습니다. 경성은 단순히 상영을 위한 도시를 넘어 영화 제작, 기획, 상영, 홍보까지 이루어지던 당시 조선의 유일한 영화 산업 도시였습니다. 1910년대 경성에서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상설극장들이 생겨났고, 서양에서 수입된 무성영화들이 소개되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인이 직접 만든 영화가 등장한 것은 1920년대 중반으로, 이때부터 경성은 ‘조선인의 영화’를 만들어 내는 거점 도시가 됩니다. 1926년, 나운규가 감독, 각본, 주연을 맡은 영화 ‘아리랑’이 경성의 단성사에서 개봉되며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민족 정서와 현실을 담은 이 영화는 경성을 중심으로 수많은 조선인들에게 감동을 주며, 한국 영화의 탄생을 알리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경성이 어떤 배경 속에서 영화 산업의 중심이 되었고, 나운규와 같은 인물들이 어떻게 영화로 민족의 정체성을 지켜냈는지를 심층적으로 살펴봅니다.

경성, 영화산업의 태동지

경성은 일제강점기 조선 내에서 가장 빠르게 서양 문물을 수용한 도시였습니다. 1903년 경성 전차 회사가 주최한 영화 상영이 조선 최초의 공식 상영 기록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후 일본 자본에 의해 극장들이 세워지며 본격적인 영화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대표적인 극장으로는 1910년에 설립된 ‘협률사’가 있으며, 이후 ‘단성사’, ‘우미관’ 같은 극장이 연달아 생겨났습니다. 이 극장들은 일본 영화뿐 아니라 서구 영화도 상영하면서 조선 시민들에게 새로운 문화 충격을 주었고, 상류층과 중산층을 중심으로 영화 관람이 하나의 유행이 되었습니다. 1920년대 들어서면서 영화는 단순한 오락을 넘어서 민족의식을 반영할 수 있는 매체로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문화적 탄압 속에서 조선인은 자기 목소리를 내기 어려웠지만, 영화는 검열을 피해 간접적으로 저항의 메시지를 담을 수 있는 도구였습니다. 이 시기, 경성에는 조선인 중심의 영화 제작자와 배우, 촬영기술자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영화사 설립이 이어졌습니다. 경성은 단지 영화가 상영되는 장소가 아닌, 영화가 ‘창작’되는 창의적인 도시로 탈바꿈했습니다. 교육 기관, 연극단, 문학단체들도 영화 제작과 연계되어 문화 콘텐츠를 형성하였고, 이는 후일 한국영화산업의 기틀이 됩니다.

조선 시대 영화 산업과 민족적 정체성

조선에서의 영화는 오락적인 요소 외에도 민족적 메시지를 담는 데 집중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라는 특수한 시대적 배경은 조선인의 문화적 표현을 크게 제한했지만, 영화는 오히려 이를 돌파구 삼아 민족 정체성을 지켜나갈 수 있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일제는 조선어 출판을 금지하고 신문, 문학, 연극 등을 철저히 검열했지만, 무성영화와 자막, 상영 해설(변사)의 형식을 통해 조선 영화인은 민족적 메시지를 우회적으로 전달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아리랑’입니다. 이 영화는 주인공이 정신병자라는 설정으로 일본인을 공격하는 장면을 우회적으로 표현하여 검열을 피하면서도 민족의 억압과 저항을 명확히 전달했습니다. 이러한 영화는 단순히 상업적인 성공을 넘어, 민중의 의식 고취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경성의 극장들은 자연스럽게 항일 감정과 민족 연대의 공간이 되었으며, 상영 후 관객이 일어나 ‘아리랑’을 부르거나 눈물을 흘리는 풍경이 자주 연출되었습니다. 1920~30년대 영화는 제작 여건이 매우 열악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지식인과 예술인들이 영화 제작에 뛰어들었습니다. 이들은 자금을 모아 필름을 구입하고, 사설 스튜디오를 임대해 촬영하며, 연출과 연기를 병행하는 열정을 보였습니다. 이러한 창작자들의 노력은 이후 광복 이후 한국영화산업의 탄탄한 초석이 됩니다.

나운규, 한국 영화의 아이콘

나운규는 조선영화의 진정한 선구자입니다. 그는 영화인으로서 다재다능한 재능을 보이며, 감독, 각본가, 배우, 기획자까지 1인 다역을 해낸 인물입니다. 1926년작 ‘아리랑’은 한국 최초의 서사형 민족영화로 평가받으며, 조선 영화사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가난과 검열, 기술 부족이라는 삼중고 속에서도 예술혼을 불태웠습니다. 당시 영화 제작 환경은 매우 열악했기 때문에, 나운규는 직접 장비를 빌리고, 배우를 섭외하고, 촬영지를 물색하며 밤낮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아리랑’에서 보여준 민족의 고통, 분열, 저항은 당대 조선인의 감정을 대변했고, 나운규는 단순한 예술가가 아닌 민족적 지도자로까지 평가받았습니다. 그의 작품은 경성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상영되었고, 그가 등장한 작품은 언제나 극장을 가득 채웠습니다. 하지만 그는 일제의 감시와 생계의 어려움 속에서 과로와 병에 시달리다 1937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납니다. 그의 사망은 당대 조선 영화계에 큰 충격을 주었고, 많은 후배 영화인들이 그의 정신을 이어가기 위한 영화제작에 매진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나운규의 정신은 ‘민족영화’, ‘독립영화’라는 이름 아래 한국영화계에 이어지고 있으며, 그의 유산은 경성이라는 도시의 기억과 함께 한국영화의 기초를 구성하는 중요한 역사적 자산으로 남아있습니다.

 

경성에서 시작된 영화, 오늘의 한국영화로 이어지다

경성은 단순히 영화의 물리적 배경이 아니라, 한국영화가 민족의 목소리를 담고 성장해온 정신적 토대였습니다. 일제의 억압 속에서도 예술로 민족정신을 표현했던 영화인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K-무비가 세계적인 문화 콘텐츠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한국영화의 역사를 ‘흥행’이나 ‘기술’의 발전으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사람들의 정신, 그리고 도전의 발자취를 함께 기억해야 합니다. 경성에서 시작된 한국영화는 단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그 유산은 오늘날에도 다양한 영화작품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으며, 우리는 이를 지켜보고, 계승해나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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